멕시코 할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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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 할양지는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따라 멕시코가 미국에 할양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조약은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로, 멕시코는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멕시코 할양지의 면적은 약 136만 km²에 달하며, 현재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일부, 콜로라도 일부, 뉴멕시코 일부, 와이오밍 일부를 포함한다. 멕시코는 이 조약으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 멕시코 할양지는 미국 내 노예제 문제와 관련된 갈등을 심화시켰고, 1850년 타협을 통해 잠시 해결되었지만, 결국 남북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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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8년 조약 -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에 체결되어 미-멕시코 전쟁을 종식시키고 멕시코가 현재 미국 서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할양하는 대신 미국이 멕시코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으나, 멕시코에는 치욕으로, 미국에는 영토 확장으로 평가되며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848년 멕시코 -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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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미국 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텍사스 합병과 영토 분쟁으로 인해 미국과 멕시코 간에 벌어진 전쟁이며, 미국이 승리하여 멕시코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 1848년 2월 -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에 체결되어 미-멕시코 전쟁을 종식시키고 멕시코가 현재 미국 서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할양하는 대신 미국이 멕시코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으나, 멕시코에는 치욕으로, 미국에는 영토 확장으로 평가되며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848년 2월 - 프랑스 2월 혁명
프랑스 2월 혁명은 1848년 2월 루이 필립 1세의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한 사건으로, 사회경제적 모순, 경제 공황 및 기근, 개혁 만찬 금지령으로 촉발된 시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으며 유럽 전역에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 할양지 | |
---|---|
지도 | |
개요 | |
명칭 | 멕시코 할양지 |
스페인어 명칭 | Cesión mexicana |
획득 시기 | 1848년 |
면적 | 529,000 제곱마일 |
면적 (중간값) | 827,000 제곱마일 |
면적 (다른 중간값) | 586,000 제곱마일 |
역사적 배경 | |
획득 원인 |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 |
획득 국가 | 미국 |
이전 소유 국가 | 멕시코 |
2. 멕시코-미국 전쟁
멕시코-미국 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직후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함락되었고, 1847년 1월에 저항이 진압되었지만, 멕시코는 영토 손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7년, 미군은 멕시코 중부를 침공하여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지만, 멕시코 정부는 북부 영토를 미국에 넘기는 것을 여전히 거부했다. 존 C. 칼훈과 같은 남부 인사들은 멕시코 중부의 많은 인구를 원하지 않아 멕시코 전체를 병합하자는 전 멕시코 운동에 반대했다.
니콜라스 트리스트는 1848년 초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하여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재정의했다. 멕시코는 조약에 따라 어떤 땅도 공개적으로 양도하지 않았지만, 재정의된 국경으로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미국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국경은 멕시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텍사스를 멕시코가 상실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멕시코 북동부 대부분 병합 수정안과 다니엘 웹스터의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받지 않으려는 수정안을 거부하고 조약을 승인했다.[1] 미국은 멕시코 영토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1500만달러 (2016년 달러로 4.82억달러)[2]를 지불하고, 미국 시민들에 대한 325만달러의 채무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멕시코 할양으로 미국에 귀속된 면적은 다음과 같다.(텍사스 전체 포함)
구분 | 면적 |
---|---|
텍사스 주장 토지 제외 | 약 약 1359737.00km2 |
분쟁 중인 텍사스 서부 주장 포함 | 총 약 1942481.43km2 |
텍사스 전체 포함 | 총 약 2369827.34km2 |
텍사스 전체를 포함하면 멕시코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1821년 멕시코 독립부터 1836년 텍사스 혁명까지 15년 동안, 멕시코 할양(텍사스 제외)은 멕시코의 약 42%를 차지했다. 그 이전에는 3세기 동안 스페인 식민지인 뉴스페인의 일부였다.
새롭게 획득될 영토 내 노예제 문제는 당시까지 가장 격렬한 지역 갈등으로 북부와 미국 남부를 양극화시켰으며, 이 갈등은 4년간의 교착 상태를 지속시켰다. 그 기간 동안 제2당 시대가 붕괴되었으며, 몰몬 개척자들이 유타에 정착하고,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가 개척되었다. 연방군의 지배하에 있던 뉴멕시코는 텍사스가 리오그란데 강 서쪽까지 주장하는 영토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막아냈다. 결국 1850년 타협으로 연방은 유지되었지만, 불과 10년 후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2. 1. 전쟁의 배경
멕시코-미국 전쟁 직후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함락되었고, 1847년 1월에 저항이 진압되었지만, 멕시코는 영토 손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7년, 미군은 멕시코 중부를 침공하여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지만, 멕시코 정부는 북부 영토를 미국에 넘기는 것을 여전히 거부했다. 존 C. 칼훈과 같은 남부 인사들은 멕시코 중부의 많은 인구를 원하지 않아 멕시코 전체를 병합하자는 전 멕시코 운동에 반대했다.니콜라스 트리스트는 1848년 초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하여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재정의했다. 멕시코는 조약에 따라 어떤 땅도 공개적으로 양도하지 않았지만, 재정의된 국경으로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미국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국경은 멕시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텍사스를 멕시코가 상실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멕시코 북동부 대부분 병합 수정안과 다니엘 웹스터의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받지 않으려는 수정안을 거부하고 조약을 승인했다.[1] 미국은 멕시코 영토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1500만달러 (2016년 달러로 4.82억달러)[2]를 지불하고, 미국 시민들에 대한 325만달러의 채무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일반적으로 멕시코 할양(텍사스가 주장하는 토지 제외)은 약 약 1359737.00km2로, 현재 미국 총면적의 14.9%에 달했다. 분쟁 중인 텍사스 서부 주장까지 포함하면 총 약 1942481.43km2이다. 멕시코가 이전 텍사스 상실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텍사스 전체를 포함하면 조약으로 양도된 총 면적은 약 2369827.34km2가 된다.
텍사스 전체를 포함한 몰수를 고려하면 멕시코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1821년 멕시코 독립부터 1836년 텍사스 혁명까지 15년 동안, 멕시코 할양(텍사스 제외)은 멕시코의 약 42%를 차지했다. 그 이전에는 3세기 동안 스페인 식민지인 뉴스페인의 일부였다.
2. 2. 전쟁의 경과
전쟁이 시작된 직후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함락되었고, 그곳에서의 마지막 저항은 1847년 1월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멕시코는 영토 손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7년 동안 미국의 군대는 멕시코 중부를 침공하여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지만, 어떤 멕시코 정부도 북부 영토를 미국에 넘기는 것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조약이 체결될 수 있을지 불확실했으며, 멕시코 전체를 병합하자는 전 멕시코 운동이 동부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가적인 영토는 원했지만 멕시코 중부의 많은 인구는 원하지 않았던 존 C. 칼훈과 같은 남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1848년 초, 니콜라스 트리스트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이 명확하게 다시 정해졌으며, 멕시코는 조약에 따라 어떤 땅도 공개적으로 양도하지 않았지만, 새롭게 정의된 국경은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미국의 통제하에 넘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새로운 국경은 멕시코가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텍사스의 핵심 동부 지역과 서부 주장을 모두 포함하여 텍사스를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멕시코 북동부 대부분 병합 수정안과 다니엘 웹스터의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받지 않으려는 수정안을 거부하고 조약을 승인했다.[1] 미국은 멕시코 영토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1500만달러 (2016년 달러로 4.82억달러)[2]를 지불하고 미국 시민들에게 대한 3250000USD의 채무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일반적으로 멕시코 할양(텍사스가 주장하는 토지 제외)은 약 525,000 제곱마일(1,400,000 km2) 또는 현재 미국의 총면적의 14.9%에 달했다. 분쟁 중인 텍사스 서부 주장도 포함하면 총 750,000 제곱마일(1,900,000 km2)에 달한다. 멕시코가 이전에 텍사스의 어떤 부분도 상실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텍사스 전체를 포함하면 이 조약에 따라 양도된 총 면적은 915,000 제곱마일(2,400,000 km2)가 된다.
텍사스 전체를 포함한 몰수를 고려하면 멕시코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멕시코 독립이 확보된 1821년부터 1836년 텍사스 혁명까지 단 15년 동안 멕시코 할양(텍사스 제외)은 멕시코의 약 42%를 차지했다. 그 이전에는 3세기 동안 스페인 식민지인 뉴스페인의 일부였다.
2. 3.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니콜라스 트리스트는 1848년 초에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하여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재정의했다. 멕시코는 이 조약으로 영토를 양도하지는 않았지만, 재정의된 국경으로 인해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미국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1] 또한, 새로운 국경은 텍사스의 상실을 멕시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미국 상원은 조약을 승인하면서 제퍼슨 데이비스의 멕시코 북동부 병합 수정안과 다니엘 웹스터의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받지 않으려는 수정안을 거부했다.[1] 미국은 멕시코 영토에서 발생한 전쟁 피해에 대해 1500만달러를 지불하고,[2] 미국 시민들에 대한 325만달러의 채무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멕시코 할양으로 미국에 귀속된 면적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면적 |
---|---|
텍사스 주장 토지 제외 | 약 |
분쟁 중인 텍사스 서부 주장 포함 | 총 |
텍사스 전체 포함 | 총 |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1848년까지 27년간 멕시코 영토였던 이 지역은 멕시코 북서부를 차지했으며, 현재 멕시코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3] 할양된 지역은 현재의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전역과 애리조나주(개즈던 매입으로 합병된 남부 지역 제외), 콜로라도주(구 텍사스 공화국 경계 서쪽), 뉴멕시코주(개즈던 매입 지역 제외, 리오그란데강 서쪽), 와이오밍주(구 텍사스 공화국 경계 서쪽, 북위 42도선 이남)를 포함한다.[4]
텍사스 전체를 포함한 몰수를 고려하면 멕시코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3. 할양된 지역
미국-멕시코 전쟁 직후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함락되었고, 1847년 1월 저항이 진압되었지만, 멕시코는 영토 손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7년 미군은 멕시코 중부를 침공,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지만, 멕시코 정부는 북부 영토의 미국 이양을 비준하려 하지 않았다. 존 C. 칼훈 등은 멕시코 중부 인구를 원하지 않아 멕시코 전체 병합에 반대했다.
1848년 니콜라스 트리스트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재정의했다. 멕시코는 조약에 따라 영토를 양도하지 않았지만, 재정의된 국경으로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가 미국의 통제하에 놓였다. 새 국경은 텍사스의 멕시코 손실을 인정했다.
미국 상원은 멕시코 북동부 병합,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받지 않으려는 수정안을 거부하고 조약을 승인했다.[1] 미국은 멕시코에 전쟁 피해 보상금 1500만달러 (2016년 가치로 4.82억달러)[2]와 미국 시민에 대한 채무 3250000USD를 인수했다.
멕시코 할양(텍사스 주장 토지 제외)은 약 525,000제곱마일(1,400,000km2) (미국 총면적의 14.9%)에 달했다. 텍사스 서부 주장 포함 시 750,000제곱마일(1,900,000km2)이며, 텍사스 전체 포함 시 915,000제곱마일(2,400,000km2)가 된다. 멕시코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멕시코 독립부터 1836년 텍사스 혁명까지 15년간 멕시코 할양(텍사스 제외)은 멕시코의 약 42%였다.
미국-멕시코 국경 협상 전부터 획득될 영토 내 노예제 문제는 미국을 남북으로 양극화시킨 주요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4년간 지속되었고, 제2당 시대 붕괴, 몰몬 개척자들의 유타 정착,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야기했다. 1850년 타협으로 연방은 유지되었지만, 10년 후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노예제 문제와 관련하여 제안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50년 타협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는 인민 주권으로 노예제 결정. 텍사스는 분쟁 지역 포기 대가 채무 탕감, 엘파소 유지. 도망 노예법 강화.
3. 1. 캘리포니아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따라 멕시코로부터 할양받은 지역 중 현재의 캘리포니아주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캘리포니아는 1850년 타협에 의해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되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1840년대 후반부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846년 8월과 1847년 2월 미국 하원에서는 멕시코로부터 획득할 새로운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윌못 조항이 통과되었지만, 미국 상원에서는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 미주리 타협선을 태평양까지 연장하여 캘리포니아 남부 대부분 지역에 노예제를 허용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실패했다.
결국 루이스 캐스와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안한 인민 주권론에 따라 각 준주가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고,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결정되었다.
3. 2. 네바다
1848년 멕시코 할양으로 멕시코 영토였던 네바다는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멕시코 할양지는 멕시코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현재의 네바다 주 전체가 포함된다.[4]
미국-멕시코 국경 협상 이전부터 획득될 영토 내 노예제 문제는 미국을 남북으로 양극화시킨 주요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몰몬 개척자들이 유타에 정착하고,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1850년 타협으로 연방은 유지되었지만, 10년 후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노예제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들이 있었다.
1850년 타협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고,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를 조직하여 인민 주권에 따라 노예제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3. 3. 유타
1848년 멕시코 할양으로 유타 지역은 멕시코에서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멕시코 영토의 북서부였으며, 멕시코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4]
몰몬 개척자들이 유타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의 노예제 문제는 미국 내 큰 갈등을 야기했다. 1850년 타협을 통해 연방은 유지되었지만, 10년 후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1850년 타협으로 유타 준주가 조직되었고, 인민 주권에 따라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3. 4. 기타 지역
4. 노예제 문제와 갈등
멕시코-미국 전쟁 직후, 획득될 영토 내 노예제 문제는 북부와 미국 남부를 양극화시킨 가장 격렬한 지역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제2당 시대가 붕괴되고, 몰몬 개척자들이 유타에 정착하고,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가 개척되었으며, 뉴멕시코는 텍사스의 영토 주장을 막아냈다. 결국 1850년 타협으로 연방은 유지되었지만, 10년 후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당시 노예제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된 주요 제안들은 다음과 같다.
제안 | 내용 | 비고 |
---|---|---|
윌못 조항 | 멕시코로부터 획득할 모든 새로운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 (텍사스 제외) | 미국 하원 통과, 미국 상원 부결 |
미주리 타협 선 연장 | 미주리 타협선(북위 36°30′선)을 태평양까지 연장 | 내슈빌 협약에서 재제안 |
인민 주권 | 각 영토가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 | 미국 민주당의 입장 |
앨라배마 강령 | 영토 내 노예제 제한 반대, 멕시코 반노예제 법 무효화 요구 | 앨라배마, 조지아주 의회 등 지지 |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제안 |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자유주로 통합 | |
데저릿 주 설립 제안 | 멕시코 할양 지역 일부를 차지하는 주 설립 | 몰몬교도 제안 |
존 벨 상원의원 제안 | 뉴멕시코를 북위 34도선 기준으로 분할, 남쪽은 노예주와 자유주로 분리 | |
1850년 타협 초안 | 텍사스 북서쪽 경계 조정 |
이러한 제안들은 노예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결국 1850년 타협을 통해 일시적인 해결을 보게 된다.
4. 1. 윌못 조항
데이비드 윌못 의원이 제안한 윌못 조항은 전년도에 합병된 텍사스를 제외하고 멕시코 할양지로 획득할 모든 새로운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1846년 8월과 1847년 2월 미국 하원에서 통과되었지만, 미국 상원에서는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이 조항을 추가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4]4. 2. 인민 주권
루이스 캐스와 스티븐 더글러스가 발전시키고 미국 민주당의 입장이 된 인민 주권은 각 준주가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4]윌리엄 L. 얀시의 "앨라배마 강령"은 앨라배마와 조지아주 의회, 플로리다와 버지니아의 민주당 주 집회에서 지지한 것으로, 연방 정부나 준주 정부가 주가 되기 전에 영토 내 노예제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두지 말고, 윌못 조항이나 인민 주권을 지지하는 후보자를 반대하며, 멕시코의 반노예제 법을 무효화하는 연방 법률 제정을 요구했다.[4]
1850년 타협은 1850년 1월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더글러스가 북부 휘그당과 남부 민주당의 반대를 극복하며 통과시킨 타협안으로, 1850년 9월에 제정되었다. 이 타협안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고,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를 조직하여 인민 주권에 따라 노예제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4]
4. 3. 1850년 타협

1850년 타협은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스티븐 더글러스가 북부 휘그당과 남부 민주당의 반대를 극복하며 통과시킨 타협안이다. 1850년 9월에 제정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한다.
-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를 조직하여 인민 주권(각 영토가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에 따라 노예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다.
- 텍사스는 분쟁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채무 탕감을 받았고, 이 지역은 두 개의 새로운 준주와 무조직 영토로 나뉘었다.
- 텍사스가 성공적으로 카운티 정부를 설립했던 엘파소는 텍사스에 남았다.
- 워싱턴 D.C.에서 노예 매매는 폐지되었지만, 노예제 자체는 유지되었고, 도망 노예법이 강화되었다.
이 타협으로 멕시코 할양지 내 노예제 문제는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으나, 이후 미국 내 노예제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5. 개즈던 매입
개즈던 매입은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에 해당하는 77700km2 지역을 1853년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구입한 사건이다. 구입한 지역은 길라 강 남쪽과 리오그란데강 서쪽 지역으로 산악 고원 지대이다.
멕시코 할양지에는 남부 항구와 연결되는 횡단 대륙 철도에 적합한 노선이 없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뉴멕시코 준주 지형에는 태평양 연안 남부에서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또는 시카고로 이어지는 철도를 자연적으로 북쪽으로 향하게 하는 산맥이 있었다. 남부 사람들은 그러한 철도가 가져올 사업에 열을 올렸고, 멕시코를 희생하여 철도에 유리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여 1853년 개즈던 매입을 가져왔다.[5]
6. 역사적 의의와 영향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통해 멕시코는 1848년에 멕시코 북부 영토를 미국에 할양했다.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알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미국에 넘겨주었고, 텍사스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했다.[1] 미국은 멕시코에 1500만달러(2016년 달러로 4.82억달러)를 지불하고,[2] 미국 시민에 대한 325만달러의 부채를 인수했다.
멕시코 할양지는 텍사스가 주장하는 지역을 제외하고도 약 에 달하며, 이는 현재 미국 전체 면적의 14.9%에 해당한다. 텍사스가 주장하는 지역까지 포함하면 총 에 이른다. 멕시코는 이 조약으로 1836년 이전 영토의 55%를 잃었다.[3]
새롭게 획득한 영토 내 노예제 문제는 미국 내에서 큰 갈등을 일으켰다. 윌못 조항은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려 했으나 상원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미주리 타협선을 태평양까지 연장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결국 루이스 캐스와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안한 인민 주권 원칙에 따라 각 준주가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1850년 타협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고,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를 조직하여 인민 주권에 따라 노예제 문제를 결정하도록 했다. 텍사스는 분쟁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부채를 탕감받았다.
멕시코 할양지에는 남부 항구와 연결되는 횡단 대륙 철도에 적합한 노선이 없었다. 이에 남부인들은 철도 건설에 유리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1853년 가즈던 매입으로 이어졌다.[5]
참조
[1]
서적
The United States and Mexico, 1821–1848
https://archive.org/[...]
C. Scribner's Sons
[2]
간행물
Treaty of Guadalupe Hidalgo, Articles XII-XV
[3]
웹사이트
Table 1.1 Acquisition of the Public Domain 1781–1867
http://www.blm.gov/n[...]
2006-09-29
[4]
논문
Adjustment of the Texas Boundary in 1850
https://books.google[...]
1904-01
[5]
서적
The California Gold Rush and the Coming of the Civil War
https://archive.org/[...]
Alfred A. Kno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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